[국민일보] “교회 사업 하시는 분이군요” 노인이 쓴소리 (2019.05.06)

작성자
jesus_admin
작성일
2020-04-03 17:02
조회
1215
[이수훈 목사의 전도군사학교]
<3> 영혼의 소중함 일깨운 사건


당진동일교회 성도들이 1997년 5월 예배 후 충남 당진 수청로 비닐하우스 교회 앞에서 기념사진을 촬영했다. 교회는 1996년 11월 허름한 폐가에서 시작됐다. 당진동일교회 제공


1996년 교회를 개척했다. 하루빨리 안정적으로 세워야 한다는 생각에 열심을 다했다. 그러나 그 열심 속에 어느 사이 탐욕이 들어와 있었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목회의 ‘무덤’이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마치 교회 사업가처럼 내 영이 병들어가고 있었다. 교회를 모르는 노인이 전도를 받다가 한마디 툭 던졌다. “교회 사업을 하시는 분이군요.” 해머로 머리를 맞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아닙니다. 어르신, 별말씀을 다 하시네요.” 돌아섰지만, 정신이 번쩍 들었다.

‘지금 내가 몸부림치는 전도라는 일이 사업가의 일과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사람을 끌어다가 교회를 채우려는 이 모습, 그렇게 하려고 교회를 시작한 것인가. 사람 모아 뭐 하려고….’ 양심에 깊이 박히는 말씀이었다. 노인의 충고는 성경으로 다시 돌아가는 계기가 됐다.

열심은 다했지만, 열매는 거의 없던 나날이었다. 돌이켜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복음의 진리에서 어긋난 목회자에게 천하보다 귀한 영혼을 맡겨주실 하나님이 아니시지 않은가. 기도할수록 많이 어긋나 있음을 알게 하셨다.

누가복음은 전도의 길라잡이라 할 수 있는 말씀이다. 그 말씀들을 돌아보면 다음과 같은 드라마가 만들어진다. “그들에게 이르시되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 하시고.”(눅 12:15)

당진동일교회 개척 초기 내 마음속엔 탐심이 은근히 내재해 있었다. 인력도, 재정도 너무 없었기 때문에 믿음과 탐심이 혼동되는 상황이었다. 목사의 마음이 슬그머니 복음에서 빗나가고 개인의 탐심으로 복음을 포장해 뛰어다닐 수 있다는 이야기다. 탐심으로 교회가 세워지고 영혼을 붙잡으러 다닌다면 얼마나 무서운 일이겠는가.

매일 늦게까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이리저리 돌아다니던 시절이었다. 열매가 없고 결과가 없는 전도의 길은 참으로 외롭고 슬펐다. 내겐 두 아들이 있었다. 당진에 내려와 임시 거처로 시골집에 세들어 살고 있었는데 4살 8살 두 아이를 방에 두고 돌아다녔다.

전도를 나갔다가 밤늦게 돌아와 보면 두 아들은 잠이 들어있었다. 하루는 주방엔 밥풀이 흩어져 있었다. 8살 큰아들이 달걀부침을 해서 동생에게 밥을 해먹인 듯했다. 아내와 나를 목이 빠져라 기다리다가 둘이 끌어안고 잠든 것 같았다. 아이들을 자리에 눕히면서 나도 모르게 목이 턱 막혔다. ‘형이라고 동생을 챙겼구나.’ 안쓰러운 마음에 잠든 아이를 안고 일어설 때마다 감정이 먹먹하게 밀고 올라와 눈물이 주르르 흘렀다.

그렇게 지내던 어느 날 밤 집에 돌아와 보니 큰아들 혼자 자고 있었다. ‘작은아들은 어디 갔지?’ 자는 아이를 깨워 물어보자 멍하니 나만 바라보고 말이 없었다. 민망하고 미안했다. “동생은 어디 갔니.” “모르겠어요. 나랑 같이 잤는데….” 정신이 아득했다.

아이를 잃어버린 그 마음이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이라는 것을 그때 처음 알았다. 집 주위를 아무리 찾아보고 소리를 질러 봐도 아이는 없었다. 바람에 나뭇가지가 흔들리는 것도 아이로 보였고 지나가는 사람들도 다 우리 아이로 보였다. 덤프트럭들이 바다를 메우기 위해 산같이 큰 바윗덩이를 싣고 부릉부릉 굉음을 울리며 스쳐 지나갔다.

온갖 불안한 생각이 머릿속을 뒤집어 놓았다. 마을에서 갈 수 있는 길은 세 갈래였다. 시내로 가는 길, 고속도로로 가는 길, 바다로 가는 길. 아내와 서로 다른 길을 정해 정신없이 뛰었다.

가다가 혹시나 해서 돌아오길 수없이 했다. 파출소에 연락하고 그렇게 몇 시간을 뛰어다녔다. 휴대전화가 없던 시절이었으니 서로 연락이 닿지 않았다. 수시로 달려와 집 안에 있는 전화기 앞에 앉았다가 다시 뛰어나가길 밤이 깊어가도록 반복했다.

그러다 전화벨이 울렸다. 가슴이 콩닥거렸다. ‘불길한 소식인가.’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전화를 받았는데 조그마한 아이가 평상에서 자고 있다는 신고가 들어왔다고 했다.

10여리 길이었다. 상상도 못 할 먼 길을 달려가서 보니 자동차수리업소 마당 평상에 아이가 엎드려 자고 있었다. ‘아니, 어떻게 여기까지 왔지.’ 아이는 얼마나 울었던지 흐느끼듯 몸을 움찔거리며 잠들어 있었다. 까맣게 때 묻은 얼굴에 눈물 자국이 그려져 있었다. 가슴이 터질 것처럼 아팠다.

아이를 안고 돌아오면서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살아있음에 감사하고 하나님께 감사하고 안전하게 만나게 됨에 감사했다. 아비로서 미안하고 슬펐다. ‘다시는 잃어버리지 말아야 한다’고 다짐했다. 그러나 그 후에도 아이를 두 번 더 잃어버렸다가 찾았다. 참 미련한 인생이다. 그 일들을 겪으면서도 영혼에 대한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잊어버리고 살았던 것이다.

누가복음 15장을 보면 한 마리 양을 잃은 사람의 이야기가 나온다. 어느 여자가 열 드라크마 중에 하나를 잃어버린 이야기도 전개된다. 작은아들이 유산을 갖고 허랑방탕하게 살다 다 망가진 후 돌아오는 비유의 말씀을 하신다. 마지막 등장인물은 큰아들이었다. 착실한 모범생인 그는 들에서 돌아오다가 집에서 벌어지는 잔치 소식을 듣고 불쾌해 했다. 종에게 그 상황을 듣고 시험이 들어 아버지께 따진다.

무엇이 문제인가. 모범적인 큰아들은 유대 종교 지도자들이 아닐까. 집 나간 작은아들을 기다리던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한 그 아들의 어리석음을 지적하신 말씀이 아닌가.

나는 진정한 전도의 의미를 생각하지도 않은 채, 교회를 세워야 한다는 마음만으로 길거리를 누빈 것이다. 작은아들을 잃어버린 사건은 그렇게 내 어두운 마음에 놀라운 깨달음으로 다가왔다.

기사링크 http://news.kmib.co.kr/article/view.asp?arcid=092407626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