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일보] “전도 현장의 적은 게으른 자신… 고백하고 기도하면 도와주실 것” (2019.04.29)
<2> 전도자 향한 하나님의 위로
이수훈 당진동일교회 목사(오른쪽)가 지난달 충남 당진의 교회에서 70대 초신자와 기념사진을 촬영하고 있다. 그는 22년 전 이 목사가 건넨 칡차를 받고 미안한 마음을 품고 있다가 세월이 한참 흐른 뒤 출석하게 됐다. 당진동일교회 제공
전도자가 낙심하고 포기하는 이유 중 하나는 자신의 힘으로 전도의 결과를 내려고 하기 때문이다. 나 역시 ‘나는 뿌리는 것뿐이요 거두시는 분은 주님이시다’라는 믿음을 갖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께서 자라나게 하셨나니.”(고전 3:6)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갈 6:9)
전도현장에서 이 말씀을 붙들면 느긋한 소망이 생긴다. 말씀에 따르면 사람들이 뭐라든 내 마음이 어떻든 전도가 그렇게 힘든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22년 전 건넨 칡차 한잔의 결과
3주 전 주일 대예배 때 일이다. “오늘 처음 오신 분을 소개합니다.” 낯익은 70대 초반의 신사 한 분이 일어나셨다. 그는 빙그레 웃으며 목례를 했다.
‘아 저분!’ 지난해 동사무소 협의회에 참석했을 때 만났던 신사였다. 그는 가만히 다가와 내 손을 잡고 이야기했다. “목사님, 저 말유. 20여년 전 목사님이 주신 칡차 얻어먹은 사람이유. 교회 앞길을 지나갈 때면 맘으로 가긴 가야 허는디 하는 생각이 있었구먼유. 언젠가 교회 한번 가긴 갈 거구먼유.”
그리고 가슴 뭉클한 말씀을 해주셨다. “실은 제가 학교를 못 댕겨서 교회를 못갔슈. 동생들 뒷바라지 허다 본께 학교를 댕길 수가 없어서 그냥 이렇게 미뤘지유. 교회를 가고 싶었는디 영 그랬슈. 뭘 알아야 헐 것 아닌게 뷰. 그런디 이번에 학교 졸업허는구먼요. 지가 한번 찾아갈 거구먼요.”
나는 22년 전 산에서 캐낸 칡뿌리로 칡차를 만들었다. 그것을 받아든 그는 교회에 가보고 싶은데 학벌이 없어 나오지 못했던 것이었다. 강단에서 그를 바라보는데 마음이 얼마나 뭉클하던지 나도 모르게 눈물이 주르르 흘렀다.
예배 후 식탁에 마주 앉았다. 곁에 따님이 있었다. “아버지가 늘 그랬어요. ‘내가 교회를 가야는디….’” 그 오래전 칡차는 드시면서 빚진 마음이 되셨던가 보다. 그 마음에 선하신 하나님이 역사하심이라 생각한다. 이것이 주님의 은혜가 아니겠는가. 우리가 어찌 영혼을 구원할 수 있단 말인가. 내 영혼 하나도 감당치 못해 늘 넘어지고 흔들리는 초라한 존재가 아니던가.
복음을 전하게 하신 분이 주님이시고 구원을 주시는 분이 주님이시니 우리는 가라 하신 말씀 따라가면 열매를 맺게 하시는 분은 예수님이시라 믿는 이유가 바로 이런 일이라 생각한다.
예수님의 사랑, 그 사랑에서 끊을 자가 누가 있는가. 어르신을 앞에 모시고 식사를 하다가 로마서 말씀이 떠올려 목이 메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롬 8:32)
복음의 장벽은 낙심하던 나였다
사실 복음의 장벽은 바로 우리 자신이었다. 전도하다가 낙심할 때가 한두 번이겠는가. 전도현장은 누구나 지치고 피곤하고 낙심되는 일들로 가득하다. 사도행전을 보면 사도들은 하루도 안전한 날이 없었던 것 같다. 공회의 핍박과 동족의 위협과 로마 황제의 탄압 앞에 늘 생명이 위태로웠다.
핍박의 강도가 점점 강해지고 매를 맞고 감옥에 갇히고 시간이 흐를수록 훼방이 극렬해졌다. 그러나 어려울수록 힘이 나는 게 복음을 품은 성도의 삶이 아니던가.
전도 현장에 설 때마다 힘들게 하는 적군은 환경도 아니었고 이웃 사람도 아니었다. 바로 무능하고 게으른 나 자신이었다. 밖으로 나가는 일은 두렵기도 하고 외롭고 지치기도 했다. 반기는 사람도 없었다. 불쾌한 얼굴로 발길을 돌리는 사람들을 만날 때면 왜 그리 비굴해지고 비참했는지 모른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불쌍히 여기시면 속히 도우실 것이다. “그는 가난한 자와 궁핍한 자를 불쌍히 여기며 궁핍한 자의 생명을 구원하며.”(시 72:13)
내 모습이 초라한 개척교회 전도사다 보니 현실에 스스로 더 위축되곤 했다. 그때마다 외친 고백이 있었다. “하나님 저를 불쌍히 여겨주소서. 이 세상 사람들이 다 조롱하고 멸시하고 외면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모습을 보고 계시는 줄 압니다. 저를 불쌍히 여겨주소서.”
오직 하나님께서 불쌍히 여겨주시기를 그렇게 애걸하며 다녔는지 모른다. 하나님께서 나를 보실 때 불쌍히 여겨주시면 속히 도와주실 것 같은 그 마음도 믿음인지는 모르겠다.
1997년 여름이 다가오고 있었다. 무더운 여름 길거리는 참으로 혹독했다. 추울 때보다 더 힘들었다. 줄줄 흐르는 땀을 닦지도 못하고 돌아다니니 동네 주민들이 안돼 보였던지 가게에 들어가면 오히려 시원한 냉차를 내주곤 했다. 민망하기 이를 데 없었다. ‘이게 하나님의 위로이신가. 이러다 전도문이 막히면 어쩌지.’ 이런 생각이 밀려왔다.
하나님께 죄송한 마음 커져
‘전도하면 자신들의 차량으로 20리(약 8㎞) 길, 좁은 논길로 1㎞를 들어와 비닐하우스밖에 없는 그곳으로 찾아올까.’ 어딜 봐도 길은 보이지 않았다. 긍정적인 요건이 없으므로 스스로 위축되는 날이 참 많았다.
그러나 여기서 멈추면 ‘여기까지가 나의 모든 것이고 이곳이 내 믿음의 종점이 된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사람들이 ‘하나님은 없다’라고 할 것이라는 죄송함이 밀려왔다. 어제나 오늘이나 내일이나 동일한 하나님의 말씀은 내게 힘을 주었다.
“그들이 옳게 여겨 사도들을 불러들여 채찍질하며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는 것을 금하고 놓으니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니라 그들이 날마다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니라.”(행 5:4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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